- 1908년 이란 남서부 술레이만 모스크 발견된 중동 최초의 유전
석유를 품고 있는 자그로스 트러스트-습곡대
이란은 중동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된 나리이다. 이란과 메소포타미아의 유출 기름은 수천 년 동안 이곳 주민들이 조명, 방수, 의학 및 기타 용도로 사용해 왔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울퉁불퉁 배사구조[1]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을 보면 한눈에 봐도 석유 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배사 구조(anticline)는 지층이 횡 압력을 받아 볼록하게 휘어진 습곡구조를 말한다. 낙타 등처럼 휘어진 곳에서 석유와 가스가 많이 발견된다. 자그로스는 아라비아판과 유라시아판이 충돌하여 만들어진 1,800km(1,100mi)에 달하는 암석대지대이다. 자그로스는 전형적인 트러스트-습곡대와 전면 분지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석유 지역으로, 140여개의 유‧가스전이 발견되었으며, 석유, 컨덴세이트, 가스의 원시부존량이 각각 6,000억 배럴, 320억 배럴에 달한다. 전세계 석유매장장의 7%가 이란의 자그로스 주변에 매장되어 있다. [2] 높은 산악지대의 영향으로 자그로스산맥 주변에는 삼림 대초원이 자리 잡고 있다.
자그로스 산맥과 배사구조
이란 석유개발 역사
이란은 중동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된 나라이다. 석유 개발의 시발점은 1890년대 프랑스의 지질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자크 드 모르간(Jacques Jean Marie de Morgan, 1857-1924)이 페르시아 서부 지방에서 땅에서 스며나오는 유출 기름(oil seeps)에 대한 지도와 보고서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다.[3]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이 보고서를 통해 유럽 기업가들의 관심을 이란의 석유 자원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에서 드 모르간과 함께 시간을 보낸 프랑스의 지질학자인 에두라드 코테는 이란에서의 석유개발 가능성을 간파했다. 그는 1900년 파리 엑스포에서, 이란의 고위관리 관리인 앙투안 키타브치 칸과(Antoine Kitabchi Khan) 테헤란에서 영국 특사로 근무했던 헨리 드러먼드 볼프 경과 함께 이란에서 현대 석유 산업 부흥 가능성을 논의한다.
헨리 드러먼드 볼프 경은 앙투안 키타브치 칸을 영국의 사업가 윌리엄 녹스 다르시( William Knox D’Arcy)에게 소개한다.
자크 장 마리 드 모건 (Jacques Jean Marie de Morgan)
5권짜리 보고서 “Mission scientifique en Perse”(1894-1905, 5권)를 “Annales de Mines”에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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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첫 유전 마스지드 술레이만(Masjid Suleyman)
영국의 사업가 다르시(D’Arcy)는 1901년 카자르 국왕(Mozzafar al-Din Shah)으로부터 60년 기한의 석유채굴권을 확보한다.
다르시 컨세션 The D’Arcy Concession
국왕은 1901년 5월 28일 서명한 채굴권에서 다르시는 러시아와 접한 북쪽 5개 주를 제외한 이란 전역에서 60년 동안 석유를 탐사, 굴착, 생산 및 수출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를 다르시 컨세션( The D’Arcy Concession)이라고 한다. 다르시는 1903년 5월에 자본금 600,000파운드로 First Exploration Company를 설립하고, 지분의 절반을 소유한다. 페르시아 국왕은 이익의 16%를 받는 조건이었다. 카자르 국왕에게는 유럽으로 호화로운 여행을 할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계약에서 국익 우선보다는 개인의 욕심이 우선했다.
영국-러시아 경쟁
당시 영국 과 러시아는 페르시아에서 영향력을 놓고 큰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두 강대국 모두 페르시아와 중동이 제국의 경제적, 군사적 이익에 중요하다고 믿었다. 러시아는 페르시아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었고 영국은 이것이 귀중한 인도 영토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두 나라는 19세기 내내 수많은 양보와 차관을 통해 페르시아에서 영향력을 놓고 싸웠다. 그 싸움의 끈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국 정부는 다르시 컨세션이 페르시아를 영국 쪽으로 다가서게 하는 데 유리한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다르시를 지원한다.
치아 수르흐(Chiah Surkh)
페르시아에서의 현장 작업을 위해 다르시는 인도 철도와 수마트라의 네덜란드 유전에서 일했던 영국 엔지니어인 조지 버나드 레이놀즈(George Bernard Reynolds)를 고용한다. 1902년 11월, 레이놀즈는 이라크 국경과 가까운 케르만샤 지방의 치아 수르크에서 첫 시추를 시작한다. 드 모르간의 보고서에 나온 주요 지역 중 하나였다.
기후 덥고, 굴착 장소는 외딴곳에 있었으며, 지역 부족민들은 외국인들에 대하여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작업은 힘들었다. 지역 노동자와 경비원을 고용하고 부족장에게 협조 대가로 돈을 지불해야 했다.
1903년 여름에 507m( 1,665 ft) 깊이에서 약간의 가스와 석유가 발견되었고, 1904년 1월, 233m(765 ft) 깊은 두 번째 시추공에서도 나온 석유의 양은 미미했다. 이미 20만 파운드가 넘는 돈을 쓰고 실망한 다르시는 양허권을 팔려고 했고, 영국이 아닌 다른 회사가 거래에 관심을 보인다.
영국의 대표적인 석유 엔지어인 토마스 레드우드( Thomas Redwood) 다르시의 채굴권이 다른나라로 넘어가는 갓을 원치 았았다. 그는 그가 오래동안 자문해왔던 스코트랠드 버마 석유회사(the Scottish Burmah Oil Company)를 소개한다.
1904년 영국 해군장관 존 피셔경( Sir John Fisher)은 군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한다. 영국은 더 많은 석유자원이 필요하게 된다. 레드우드와 피셔가 주도하여 Concessions Syndicate Ltd.를 설립하고 다르시의 이란 석유 채굴권을 인수한다. 이 회사는 버마 석유 회사와 은퇴한 부유한 영국인인 스트래스코나 경이 자금을 지원했다. 지분을 대부분 인도한 다르시는 새 회사의 이사로 일하였다.
레이놀즈의 시추장소
사우스웨스트 자그로스
1905년, 새 회사 경영진의 지시에 따라 레이놀즈는 치아 수르크에서 굴착 장비를 남부 후제스탄 주(Khuzistan province)로 옮긴다.
샤르딘( Shardin)
후제스탄의 샤르딘( Shardin)은 다른 지질학자들에 분석 결과 유전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은 곳이었다. 샤르딘에는 타슈크 불의 산(Tashkooh Firiing Mount)이 있는 곳이다. 현도 불타고 있는 산으로 관광지로 유명하다(별표마크 클릭). 레이놀즈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샤르딘에서 두 개의 유정(well)을 뚫었다. 한 곳에서 660m 깊이까지, 뚫었고, 1907년 다른 한곳에 590m 까지 뚫었으나 모두 건조 유정(dry well)이었다.
타슈크 불의 산
마스지드 술레이만 Masjid Suleiman
레이놀즈는 아하바즈(Ahavaz)에서 북동쪽으로 약 88km(55마일) 떨어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지역에서 새로운 유정을 뚫어보기로 한다.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마이단 나프툰(Meidān Naftoon)으로 알려진 곳이다. 마이단 나프툰은 “석유 지대(Field of Oil)”을 의미한다. 주변에는 불을 숭배했던 조로아스터교의 유적지가 많이 있는 곳이다. 대표적으로 사마르-마스지드 불의 사원으로 알려진 거대한 석조 구조물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에 건축된 것이다. 각 변이 25m 길이의 계단 두 세트로 이루어진 남은 구조물에는 불규칙하게 광택이 나는 돌돌, 부러진 둥근 기둥, 아치형 천장이 있는데, 한때 웅장한 조로아스터교의 불의 사원이다. 파르티아 제국(안식국) 시대에 새워진 것으로 보이는 예배 장소와 돌기둥이 있는 곳이다 (지도 별표 클릭).
술레이만 모스크( Masjid Suleiman)의 분출
레이놀즈의 끈질긴 노력은 결실을 맺기 시작한다. 1908년 5월 16일 마스지드 수례이만 한 굴착지점에서 기름이 24m(80ft)이상 치솟은 것이다. 이소식은 영국으로 긴급히 타전되어졌지만 성경 시편을 인용해 암호화 해서 보냈기 때문데 정작 영국 본사에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같은 해 6월에는 2호 유정이 9월에는 3호 유정을 뚤었는데, 1호 유정보다훨씬 많은 석유가 나왔다고 한다.중동 최초의 이 유전을 발견하는 데 7년이 걸렸고 거의 50만 파운드가 들었다
술레이만 모스크 유정
유전 및 가스전
아스마리 저류층 Asmari Reservoir
마스지스 술레이만(Masjid Suleiman )오일은 300m(1000ft)이상의 두께의 석회암으로 덮인 저장소에 갇혀있었다. 이곳은 인근 아스마리(Asmari)산의 이름을 따서 아스마리 저류층(Asmari Reservior)라고 명명한다.
이 저류층은 올리고세-초기 마이오세(Oligocene-Lower Miocene)에 자그로스 전방분지의 깊은 곳에서 역단층으로 형성된 배사구조에 갇혀 있었다. 이곳에서 추출된 석유는 1.3%의 유황을 함유한 경질 원유였다. 1979년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마스지드 술레이만에는 추가로 314개 시추공을 뚫어 하루 7,000배럴을 생산했다. 지금은 더 깊은 저류층에서 원유를 뽑아내지만, 자그로스 석회암은 여전히 석유를 담고 있는 저류암이다. [4] 마스제드 솔레이만 유전은 원시매장량이 66.3억 배럴이었으며, 1913년 5,000 배럴/일을 시작으로 1933년 최대 생산 112,000 배럴/일에 도달하여, 2006년까지 11.1억 배럴을 누적 생산하였다.[5]
아스마리의 횡단면도
불행의 씨앗
미스지드 술레이만 유전은 엄청난 상업적,지정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909년 4월 런던은 Concessions Syndicate Ltd의 자본금을 확충해 새로운 회사 APOC(Anglo-Persian Oil Company)를 설립한다. 이 회사는 BP(British Petroleum)의 전신이다. 1914년 윈스턴 처칠 정부는 영국 해군에 보다 저렴한 석유를 공급하기 위해 APOC지분의 51%를 매수한다. 페르시아 석유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대전기간동안 영국 해군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상당량의 석유를 공급합니다.
APOC는 1935년 레자 샤의 요청으로 Anglo-Iranian Oil Company(AIOC)로 개칭한다. 1939년까지 5개의 유전을 추가 발견하여 일일 생산량이 214,000배럴/일에 도달하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139,000 배럴/일 수준까지 감소하였고, 종전 이후 회복하여 1950년에는 664,000 배럴/일을 생산하였다.[6]
CIA, 이란 모사데그 정권 축출
1951년 4월 이란 하원은 모사데그(Mohammad Mosaddegh)를 압도적인 표결로 총리로 선출했고, 팔레비 국왕도 마지못해 그를 총리로 승인했다. 의회는 곧바로 AIOC의 유전을 접수할 것을 의결했다. 페르시아 석유 채굴권과 판권을 가지고 있는 영국회사는 막대한 이득을 남겼다. 영국회사는 이란에 16%로의 수익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란에 돌아온 수익금은 고작 8%밖에 되지 않았다. 이점이 이란 석유의 국유화 존쟁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5월 1일 모사데크 정부는 AIOC의 유전과 정유시설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1953년 이란의 국유화 이후 AIOC는 British Petroleum과 National Iranian Oil Company로 분할된다. 모사데크 정권은 군 통수권도 장악해 팔레비 국왕을 무력화시켰다.
이란의 석유국유화 사태는 영국의 권위에 정면 도전하는 행위로 허버트 모리슨(Herbert S. Morrison) 외무장관은 영국군을 파병해 모사데크 정권을 축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란 석유를 한방울도 팔 수 없게 만들어라
BP는 미국의 5대 메이저와 로열더치셸을 동원해 이란산 석유 매입을 중단하도록 해 이란의 석유 국유화 조치를 무력화 하려고 한다. . 세븐시스터스(Seven Sisters)라 불리는 거대 석유메이저들의 담합으로 이란은 기름을 한방울도 팔수 없었다. 모사데크 총리는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에데 도움을 요청했지만 한달후에 보낸 편지에서 “이란은 국제의무를 지킬 필요가 있다”며 냉담하게 거절한다. 모사데그를 추방하려다 실패한 팔레비 국왕은 로마로 망명한다.
석유의 국유화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한방울도 팔수 없게되 이란 경제는 수직 낙하했고, 국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졌다. 유전 국유화는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모사데크에 대한 국민의 불만도 높아졌다. 모사데크는 소련에 접근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CIA,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
미국의 CIA와 이란 내 반모사데크 세력이 쿠테타 음모를 꾸몄다. 주도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손자 커미트 루스벨트(Kemit Roosebelt Jr.)였다. 미국 정보기관 CIA와 영국 정보기관 MI6가 작전을 짠다. CIA와 MI6는 백악관의 승인 없이 모사데그를 축출할 계획을 세웠다. 이 작전명이 아작스(Ajax)이다. 이들은 이란에서의 주도권이 소련에 넘어갈지 모른다고 협박해 승인을 받아낸다. 1953년 4월4일 CIA 본부는 테헤란으로 100만 달러를 보낸다. 가난했던 이란에서는 엄청난 돈이었다. 그들은 사원의원들, 군 고위층 인사, 신문 편집자와 출판인, 폭력배, 그리고 모사데그 내각 가운데 최소한 한 명에게뇌물을 먹인다. 그들은 현금이 가득 든 과자 깡통으로 정보를 샀다.[7]
이란의 비극 모사데그 축출
MI6는 퇴역장군 파졸라 자헤디를 쿠데타 전면에 나설 인물로 선택하고 그를 매수한다. CIA는 장교 7만 5,000달러를 그에게 보내 군사 참모들을 조직하게 하고 쿠데타를 직접 실행할 장교들을 선택하게 한다. 디데이가 밝으면서 자헤디가 이끄는 쿠데타 세력은 육군본부, 방송국 ‘테헤란 라디오’, 모사데그의 집, 중앙은행, 경찰본부, 그리고 전신전화국을 장악한다. 그리고 모사데그의 각료들을 체포한다. 이렇게 모사데그는 추출되고 팔레비 국왕이 CIA의 도움으로 다시 권력을 되찾는다.
이 사건으로 중동 산유국의 권력이 미국과 영국 석유 메이저들의 이익에 반할때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는 선례가된다. 아작스 작전을 계기로 중동의 석유 패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간다.
1953년 모사데그가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에 의해 기획된 쿠데타로 실각하고, 1954년 IOC들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이란의 석유 산업을 장악하한다.
1954년 8월 석유메이저들은 이란 석유를 배분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협의 결과, BP가 40%, 미국의 5대 메이저가 40%, 로열더치셸이 14%, 프랑스의 CFP가 6%를 갖기로 했다. 미국 몫 40%는 엑슨, 모빌, 소칼, 텍사코, 걸프오일이 사이좋게 8%씩 나눠 가졌다. 이로써 이란 석유는 BP 단독 소유에서 세븐시스터스와 프랑스 회사가 참여하는 8대 회사의 소유가 되었다. 후에 미국은 독립계 석유회사에 5%를 나눠주어 5대 메이저의 개별 지분은 7%로 낮아진다.[8]
컨소시엄은 육상에서 Ahwaz (원시매장량 279억 배럴), Marun (497억 배럴), Rag Safid (187억 배럴), Bibi Hakimeh (170억 배럴), Parsi (123억 배럴), Karanj (104억 배럴), Mansouri (210억 배럴), 해상에서 Dorood (140억 배럴), Abuzar (90억 배럴) 등의 초대형 유전들을 발견하였고, 1973년 ~600만 배럴/일 생산을 달성하여, 1979년 이슬람 혁명 전까지 비슷한 생산 수준을 유지하였다.[05]
이란혁명의 후폭풍
1979년 호메이니에 의해 이란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중동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함께 중동에서 최고의 동맹국가였다.
이란혁명
혁명으로 컨소시엄의 모든 계약이 무효화되고, NIOC가 독자적으로 이란의 석유산업을 이끌게 되면서, 1979년 생산이 317만 배럴/일로 떨어지고, 1980년 이라크와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150만 배럴/일로 급감하였다.
2012년 우라늄 농축으로 촉발된 경제 제재로 원유 수출이 막히면서 생산이 ~100만 배럴/일 이상 줄어들어 2013년에는 320만 배럴/일 생산하였다. 2015년 ‘이란 핵문제에 대한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PC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이 타결된 이후, 루하니 정부가 유전개발 계약 방식을 개선하고 제재로 철수했던 IOC들의 복귀와 새로운 투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생산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후폭풍 - 중동에는 언제 평화가 올 것인가?
이란은 2023년 현재 일평군 2,82 million b/d를 생산한다. 이란의 원유 매장량은 2086억 배럴이고, 전세계 매장량의 12%나 차지한다. 그러나 미국의 제제로 경제는 최악의 상태이다.점차 회복되어 가던 중 이란-이스라엘 갈등은 증폭되었다. 이스라엘에 의한 하마스 지도자 암살과 헤즈볼라 지도자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지난 10월 1일 이란은 이스라엘에 미사일 200여발을 쏴 경고를 하였다.
이스라엘은 보복 공격을 다짐했고, 그 공격으로 이스라엘에 가장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목표물이 이 유전 시설들이다. 유전 시설에 대한 공격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중동에서 패권이 약화된 미국은 이란-이스라엘 갈등을 통해 다시 한번 패권을 강화 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1953년 CIA의 정권교체를 노린 공작이 다시 계획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 갈등의 끝은 이란이 백기 들던지, 정권 교체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관련내용
참조자료
01 “석유의 생성과정”, 석유공사
02 고재홍, “Petroleum Geology of Iran,”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Mineral and Energy Resources Engineers. 31 October 2017. 549-606
03 Rasoul Sorkhabi, “The First Oil Field in the Middle East”, AAPG Explorer, June 2018.
04 A. Telmadarreie, S. R. Shadizadeh, B. Alizadeh “Investigation of Hydrogen Sulfide Oil Pollution Source: Asmari Oil Reservoir of Marun Oil Field in the Southwest of Iran” Iranian Journal of Chemical Engineering
Vol. 9, No. 3 (Summer), 2012, IAChE.
05 Moujahed I. Al-Husseini. “Iran’s crude oil reserves and production,” GeoArabia (2007) 12 (2): 69–94.
06 고재홍, “Petroleum Geology of Iran,”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Mineral and Energy Resources Engineers. 31 October 2017. 549-606
07 팀와이너(2007), 잿더미의 유산.(이강식 옮김), 램덤하우스 코리아(주)
08 석유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앤써니 심슨, 책갈피(2000), P180~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