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회담 #02-카이로로 가는 길, 회담배경과 각국의 목표

카이로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과 전후 아시아 질서에 대한 연합국 주요 3개국(미국, 영국, 중국)의 전략적 목표와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중요한 외교 무대였다.

카이로의 Big 3

카이로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과 전후 아시아 질서에 대한 연합국 주요 3개국(미국, 영국, 중국)의 전략적 목표와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중요한 외교 무대였다. 각국은 공동의 적인 일본을 패퇴시킨다는 대의 아래 모였지만, 동시에 자국의 국익을 극대화하고 전후 세계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미국은 회담을 주도하며 여러 가지 목표를 추구했다.

첫째, 일본의 ‘무조건 항복’ 원칙을 연합국 공동의 목표로 재확인하고 이를 위한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둘째, 태평양 전선에서의 군사 전략, 특히 중국 지원을 위한 버마 전역 작전 계획을 구체화하고 연합국의 협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셋째, 루스벨트는 장제스의 중화민국을 전후 아시아의 안정과 질서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4대 강국’의 일원으로 격상시키고자 했다. 이는 중국의 항전 의지를 고취하고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넷째, 일본이 강탈한 영토의 처리 원칙을 정립하고, (선택적이나마) 반식민주의 원칙을 반영하여 미국의 도덕적 리더십을 강조하는 동시에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하는 전후 아시아 질서를 구상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4인의 경찰’ 구상을 바탕으로 한 전후 국제 평화 유지 기구(UN) 창설의 기반을 다지는 것도 중요한 목표였다

영국 (처칠 총리)

영국의 최우선 목표는 유럽 전선에서의 승리와 독일 패망이었다. 아시아 전선에 대해서는 자국의 광대한 식민 제국(인도, 버마, 말라야, 홍콩 등)의 이익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데 주력했다. 처칠은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의 ‘강대국’ 부상에 회의적이었으며, 전후 미국의 패권 확대를 경계했다. 따라서 유럽 전선의 중요성을 내세우며 버마 전역에 대규모 자원을 투입하는 것에 소극적이었고 , 자국 제국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는 식민지 독립에 대한 포괄적인 선언에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카이로 회담

중화민국 (장제스 주석)

중국에게 카이로 회담은 아편전쟁 이래 지속된 반식민 상태를 벗어나 국제 사회에서 주요 강대국으로 인정받는 역사적인 기회였다. 장제스는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더 많은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확보하고 , 일본의 군사적 압박을 완화하기 위한 연합군의 적극적인 군사 작전, 특히 버마에서의 공세를 강력히 요구했다. 또한, 만주, 타이완, 펑후 제도 등 일본에 빼앗긴 영토의 완전한 반환을 약속받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나아가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 특히 한국의 독립을 주장함으로써 전후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완충 지대를 확보하려는 전략적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국가지도자주요 목표 및 입장
미국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일본의 무조건 항복 관철
- 중국의 '4대 강국' 지위 격상 및 항전 지원
- 버마 전역 등 대일 군사 전략 조율
- 전후 아시아 질서 주도 및 UN 창설 구상
- 한국 독립 지지 (단, 신탁통치 염두)
영국윈스턴 처칠- 유럽 전선 우선 및 독일 패망 집중
- 대영 제국(식민지) 이익 보호 및 유지
- 중국의 강대국 부상 및 미국 영향력 확대 경계
- 버마 전역 대규모 자원 투입 소극적
- 식민지 즉각 독립 반대, 한국 독립 명시 소극적 → 'in due course' 문구 선호/제안
- 홍콩 반환 논의 거부
중화민국장제스- 국제 사회 '4대 강국' 인정 확보
- 미/영으로부터 군사 및 경제 원조 확보
- 연합군의 적극적 대일 군사 작전(특히 버마) 촉구
- 만주, 타이완 등 일본에 빼앗긴 영토 반환 약속 확보
- 한국 독립 주장 (전략적 고려 포함)

결국 카이로 회담은 단순한 군사 전략 회의를 넘어, 각국의 전후 구상과 국가적 야심이 충돌하고 타협하는 복잡한 외교의 장이었다. 미국은 중국의 지속적인 항전을 유도하고 전후 아시아 질서를 주도하기 위해 중국의 위상을 높이고 영토 요구를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은 미국의 지원과 국제적 인정을 통해 실리를 확보하고자 했다. 영국은 자국의 제국적 이익을 지키면서 유럽 전선에 집중하려 했다. 이러한 각국의 상이하고 때로는 상충하는 목표들은 회담의 결과물인 카이로 선언에 그대로 반영되어, 어떤 부분(중국의 영토 회복)은 명확하게 합의되었지만, 다른 부분(한국의 독립 시기, 홍콩 문제)은 모호하게 남겨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루스벨트는 회담의 개최와 중국의 참여를 강력하게 추진하며 회담의 설계자 역할을 했지만 , 그의 구상은 현실적인 제약에 부딪혔다. 영국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는 식민지 문제에 대한 미국의 이상주의적 접근을 제약했으며 , 소련의 스탈린이 장제스와의 만남을 거부하면서 결국 루스벨트가 구상했던 4대 강국 정상회담은 카이로(미-영-중)와 테헤란(미-영-소)으로 분리되어 개최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전후 세계 질서 구상에 있어 미국의 영향력에도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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