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디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미 16년 전,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시도가 양국 간의 장기적인 대결을 초래할 것이라고 미국에 강력히 경고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최근 워싱턴 D.C. 소재의 국가안보문서보관소(National Security Archive)가 공개한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2008년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우크라이나 문제를 둘러싼 극도의 불신을 드러냈다.
국가안보문서보관손는 2001년 6월 16일 슬로베니아 브르도 성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나눈 대화와 2005년 9월 16일 워싱턴에서 열린 정상회담의 비망록을 기밀 해제하여 공개했다.
국가안보문서보관소는 어떤 곳인가? 조지 워싱턴 대학교 부설 독립 연구기관으로, 1985년 저널리스트와 학자들이 정부의 비밀주의에 맞서기 위해 설립했다. 정보공개법(FOIA)을 통해 입수한 방대한 양의 기밀 해제 문서를 관리하며, 미국 내 비정부 기관 중 세계 최대 규모의 기밀 문서 저장소로 평가받는다. 이곳에서 공개되는 자료는 외교·안보 분야의 결정적 증거로 인용되며 높은 공신력을 가진다.
미국 국가안보회의(NSC) 통역사들의 기록에는 푸틴 대통령의 생생한 발언이 담겨 있다. 푸틴은 부시 대통령에게 “앞서 모스크바를 방문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에게 했던 말을 반복하려 한다”며 운을 뗐다.
그는 이어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답변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지만, 직접 말해두고 싶다”며 “우크라이나와 같은 국가가 나토에 가입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양측 사이에 갈등의 장을 만들고, 결국 장기적인 대결을 초래할 것임을 강조한다”고 못 박았다.
부시 대통령이 그 이유를 묻자, 푸틴은 나토의 군사 기지와 무기 체계가 러시아 국경 근처로 전진 배치되는 상황이 러시아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고 답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내부 사정도 언급했다. 그는 모든 우크라이나인이 나토 가입을 원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인구의 3분의 1인 1,700만 명이 러시아계 주민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분열 가능성을 시사했다.
2024년 인터뷰서 재점화된 '2008년의 약속'
푸틴 대통령은 지난 2024년 2월 미국 언론인 터커 칼슨과의 인터뷰에서도 이 시기를 회상했다. 그는 당시 워싱턴이 다른 나토 회원국들에 압력을 가해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가입을 추진했다고 주장했다.
푸틴은 2008년 부쿠레슈티 정상회의를 언급하며 “독일과 프랑스 등 일부 유럽 국가들이 반대했음에도, 강인한 정치인이었던 부시 대통령의 압박에 결국 그들이 동의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서방 국가들이 나중에 ‘우크라이나가 지금 당장 가입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어제 압력을 받아 동의했다면 내일 또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냐”며 서방 측의 보장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을 강하게 드러냈다.
문호 개방에서 헌법 명문화까지
실제로 2008년 4월 부쿠레슈티 정상회의 선언문에는 구체적인 시기는 없었지만 ‘우크라이나와 조지아를 나토에 받아들이겠다’는 서면 약속이 포함되었다. 이후 우크라이나의 행보는 푸틴의 우려를 현실화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2019년 2월, 우크라이나 의회는 나토 가입을 국가적 목표로 삼는 헌법 개정안을 채택했다. 이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역시 취임 이후 줄곧 나토 가입 의지를 반복적으로 천명하며 러시아와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해 있다. 2008년 푸틴이 예고했던 ‘장기적 대결’이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비극적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