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토 가입 20년 유예와 ‘고슴도치 전략’의 교환, 그리고 남겨진 5%의 뇌관
4년 넘게 국제 질서를 흔들어 온 우크라이나 전쟁이 중대 분수령을 맞았다. 2025년 12월 28일(현지시간), 플로리다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회담은 지난 2월 백악관 회동의 냉기류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95%의 합의”는 과연 종전의 신호탄인가, 아니면 또 다른 분쟁의 동결인가. 이번 회담의 이면에 깔린 전략적 셈법과 ’20개항 평화안’의 내용을 알아본다
회담장 밖의 행보부터 분석할 필요가 있다. 젤렌스키의 마라라고 행(行)은 두 곳의 경유지를 통해 치밀하게 설계됐다.
첫째는 키예프의 전사자 유가족 면담이다. 이는 단순한 국내 정치용 퍼포먼스가 아니다. 트럼프의 ‘거래적(Transactional)’ 접근법에 맞서 ‘도덕적 명분’이라는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다.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라”는 유가족의 메시지는 영토 할양 압박에 대한 정치적 마지노선이자, 굴욕적 타협을 거부할 명분으로 작용했다.
둘째는 캐나다 핼리팩스 경유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와의 회동은 ‘자원 안보 동맹’의 구체화를 의미한다. 우크라이나의 광물 자원을 북미 공급망(Supply Chain)에 편입시키는 구상을 통해 트럼프에게 제시할 경제적 인센티브를 극대화했다. 동시에 G7 국가와의 연대를 과시함으로써, 대미(對美) 단독 협상에서 올 수 있는 고립감을 상쇄하고 협상력을 제고했다.
'20개항 평화안'의 해부: 안보와 경제의 빅딜
양측 실무진이 조율한 이른바 ’20개항 평화 계획(The 20-Point Plan)’의 윤곽이 드러났다. 핵심은 군사, 안보, 경제의 3대 축으로 요약된다.
군사: 현상 동결 (Freeze in Place) 현재의 전선(약 1,200km)을 국경이 아닌 정전 라인으로 인정하고, 폭 4km 내외의 비무장지대(DMZ)를 설치한다. 주목할 점은 평화유지군의 구성이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기조에 따라 미군이 아닌 유럽 군대가 주둔하여 완충 역할을 수행한다.
안보: 고슴도치 전략 (Porcupine Strategy) 가장 논쟁적인 대목이다. 우크라이나는 나토(NATO) 가입을 향후 20년간 유예한다. 이는 러시아의 침공 명분을 제거하는 조치다. 그 반대급부로 미국은 나토 5조(집단방위)를 대체할 ‘고슴도치 전략’을 제공한다. 압도적인 재래식 무기 지원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요새화하여, 러시아의 재침공 비용을 감당 불가능한 수준으로 높이는 억제 전략이다.
경제: 스냅백(Snapback)과 자원 스왑 대러 제재는 즉각 해제가 아닌, 합의 파기 시 자동 복원되는 ‘스냅백’ 조항을 전제로 완화된다. 우크라이나는 리튬, 티타늄 등 핵심 광물 개발권에 대한 미국 기업의 우선 참여를 보장했다. 안보를 수입하고 자원을 수출하는 전형적인 전략적 교환이다.
만찬의 정치학: '이너 서클'과 위계
회담 후 이어진 만찬은 상징적이다. 스테이크와 감자튀김, 트럼프의 이름이 새겨진 초콜릿 케이크라는 ‘컴포트 푸드(Comfort Food)’의 제공은 젤렌스키를 트럼프의 사적 영역(Inner Circle)으로 받아들인다는 유화적 제스처다.
그러나 공간 정치는 냉정했다. 화려한 마라라고 연회장에서 트럼프가 상단에 위치하는 시각적 구도는 이번 딜의 ‘설계자(Architect)’이자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명확히 했다. 환대는 하되 위계는 분명히 하는, 트럼프식 외교의 전형이다.
남겨진 5%의 뇌관: 영토와 다자 보증
95%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남은 5%는 여전히 지정학적 뇌관이다. 핵심은 돈바스를 포함한 점령지의 법적 지위 문제다. 트럼프는 푸틴과의 통화를 통해 협상을 종용했으나, 전선 우위를 점한 러시아가 점령지를 순순히 반환할 리 만무하다. 젤렌스키 입장에서도 영토 포기의 명문화는 정권의 명운을 건 도박이다.
결국 해법은 내년 1월 워싱턴 정상회담으로 넘어갔다. 이 자리는 트럼프와 젤렌스키 양자 회담이 아닌,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 주요국 정상이 참여하는 다자 회담 형식이 될 전망이다. 트럼프가 판을 깔고(Initiator), 유럽이 안보와 이행을 보증하며(Guarantor), 젤렌스키가 서명하는(Signatory) 구조다.
마라라고 딜은 이상적인 평화보다는 현실적인 ‘거래’에 가깝다. 서류상의 합의가 현장의 포성을 멈추게 할 수 있을지, 내년 1월 워싱턴이 그 최후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