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과 전후 세계 질서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인 분기점이었다. ‘빅3’ 정상의 첫 대면이라는 상징성을 넘어, 회담에서는 연합국의 승리를 결정짓는 중대한 군사 전략적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동시에 미래 세계의 밑그림을 둘러싼 강대국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갈등의 씨앗이 뿌려졌다.
회담장소: 러시아 소련 대사관
개최 개요: 시기, 장소, 참석자
테헤란 회담은 1943년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나흘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개최되었다. 회담의 공식 암호명은 ‘유레카(Eureka)’였다.
담 장소 선정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스탈린은 여러 이유로 소련 영토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는 비행 공포증이 있었고, 전쟁 중 최고사령관으로서 모스크바 지휘부와의 지속적인 연락 유지를 원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장소를 선호했다. 이 때문에 루스벨트와 처칠이 제안했던 카이로, 바그다드, 바스라 등은 모두 스탈린에 의해 거부되었다. 결국 스탈린은 세 연합국(영국, 소련, 미국) 군대가 모두 주둔하고 있어 안전 확보가 용이하고 소련과의 지리적 근접성도 높은 테헤란을 회담 장소로 제안했고, 루스벨트와 처칠이 이를 수용했다.
소련 대사관(회담장)에 도착한 루스벨트 대통령을 태운 차
특히 루스벨트는 당시 휠체어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장거리 이동이 매우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 스탈린과의 회담 성사를 위해 테헤란행을 감행했다. 그는 보안 및 편의상의 이유로 테헤란 주재 소련 대사관에 머물렀는데, 이는 스탈린이 루스벨트를 감시하고 회유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였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합동 참모회의
회담에는 ‘빅3’ 정상 외에도 각국의 외무장관(영국의 앤서니 이든(Anthony Eden),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등)과 해리 홉킨스(Harry Hopkins)와 같은 루스벨트의 최측근 보좌관, 그리고 각국 군 최고 사령부의 참모들이 배석하여 군사 및 정치적 현안에 대한 실무적인 논의를 지원했다.
핵심 의제
테헤란 회담의 첫째,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앞당기기 위해 연합국, 특히 ‘빅3’ 간의 공동 군사 전략을 최종적으로 조율하고 확정하는 것,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서유럽에서의 제2전선 개설 시기와 규모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둘째, 독일 패망 이후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도록 설득하고 그 약속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셋째, 전쟁 이후의 세계 질서를 구상하며 독일 처리 문제,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의 국경 문제, 그리고 국제연합(UN) 창설과 같은 주요 정치적 현안들에 대한 초기 입장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논의들을 통해 연합국 간의 상호 이해를 증진하고 전시 협력을 더욱 공고히 다지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다.
테헤란 회담
함께보기
제2전선(오버로드 작전) 확정
테헤란 회담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의제는 단연 서유럽에서의 제2전선 개설 문제였다.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동부전선에서 막대한 인명 및 물적 손실을 감수하며 홀로 독일 육군 주력과 맞서 싸우던 스탈린은 서방 연합국에게 지속적으로 제2전선 개설을 촉구해왔다. 그는 테헤란 회담 첫날부터 이 문제를 최우선으로 제기하며, 단순한 원칙적 동의를 넘어 구체적인 작전 개시 시점을 명시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Overload Operation
오랜 논의와 조율 끝에, 연합국은 1944년 5월까지(이후 기상 악화로 연기되어 실제로는 6월 6일에 개시됨)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을 통해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이 작전에는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이라는 암호명이 부여되었다. 오버로드 작전의 성공적인 실현은 나치 독일 점령 하의 서유럽 해방과 연합군의 최종 승리에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합의의 대가로 스탈린은 오버로드 작전 개시 시점에 맞춰 동부전선에서도 대규모 공세를 개시하여, 독일군이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대거 이동시키는 것을 방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1944년 6월 말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Operation Bagration)’으로 구체화되어, 동부전선에서 독일 중앙집단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바그라티온 작전(Operation Bagration)’
제2전선 개설 논의 과정에서 연합국 내부의 미묘한 역학 관계가 드러났다. 처칠은 전통적으로 영국의 영향력이 강한 지중해 전선(이탈리아, 발칸 반도)에서의 작전 확대를 선호했으며, 1943년 내 프랑스 북부 상륙작전 실시에 대해서는 상륙정 부족 등 현실적인 어려움을 들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테헤란 회담에서는 스탈린의 강력한 요구와 이를 지지하는 루스벨트의 입장에 밀려 결국 오버로드 작전 합의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전쟁 수행 과정에서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비중이 점증함에 따라 영국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전후 세계 질서의 주도권이 미국과 소련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변화였다. 테헤란에서의 오버로드 작전 최종 합의는 단순히 군사적 결정을 넘어선 지정학적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동부전선의 부담을 덜고자 하는 소련의 절박한 요구와 , 전쟁을 조속히 종결시키고 소련의 협력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판단이 영국의 지중해 중심 전략 및 제국 이익 유지 구상을 압도했음을 보여준다.
루스벨트가 처칠 대신 스탈린과 공조하는 모습은 전후 세계 질서를 주도할 새로운 강대국(미-소)의 부상과 영국의 상대적 위상 약화를 극명하게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다.
한편, 오버로드 작전을 보조하기 위한 남프랑스 상륙작전(Operation Anvil, 이후 Operation Dragoon으로 개칭) 계획도 논의되었다. 이 작전은 오버로드 작전과 동시에 실시하여 독일군의 병력 분산을 유도하려는 목적이었으나, 상륙정 등 가용 자원의 절대적인 부족 문제로 인해 결국 오버로드 작전 개시 이후인 1944년 8월 15일에 축소된 규모로 실행되었다.
소련의 대일 참전 약속과 조건
테헤란 회담의 또 다른 중요한 성과는 소련의 대일(對日) 전쟁 참전 약속을 확보한 것이다. 루스벨트는 태평양 전쟁의 조속한 종결을 위해 소련의 군사적 도움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고, 스탈린에게 지속적으로 참전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테헤란 회담에서 독일이 최종적으로 항복한 이후 2~3개월 내에 연합국의 대일 전쟁에 참전할 것임을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스탈린은 당시 소련군이 동부와 서부 양면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다고 주장하며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야 참전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1943년 일본제국
소련의 참전을 확보하기 위해 루스벨트는 스탈린이 요구한 상당한 대가를 수용했다. 여기에는 전후 쿠릴 열도(Kurile Islands)와 사할린 섬(Sakhalin) 남부의 소련 귀속, 그리고 중국 북동부 랴오둥 반도에 위치한 부동항인 다롄(Dairen, 大連) 및 뤼순(Port Arthur, 旅順) 항구에 대한 소련의 접근권 및 사용권 인정 등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합의는 러일전쟁(1904-1905) 패배로 제정 러시아가 상실했던 극동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소련의 전략적 목표와 맞닿아 있었다. 테헤란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원칙적 합의의 구체적인 내용과 조건들은 이후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비밀 협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문서화되었다.
독일 분할 및 폴란드 국경 조정
테헤란 회담에서는 당면한 군사 전략 문제 외에도 전쟁 이후의 유럽 질서를 재편하는 중요한 정치적 문제들이 논의되었다. 특히 독일의 처리 문제와 폴란드의 국경 조정 문제는 연합국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향후 냉전 구도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핵심 쟁점이었다.
독일 분할 논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재침략을 영구히 방지해야 한다는 데에는 ‘빅3’ 정상 모두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를 위한 방안으로 독일을 여러 개의 국가로 분할하거나 연합국이 분할 점령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분할 방식에 대해서는 정상들 간에 상당한 의견 차이가 존재했다. 루스벨트는 독일을 5개 또는 7개의 자치 지역으로 나누고, 킬 운하(Kiel Canal) 주변, 루르(Ruhr) 공업 지대, 자르(Saar) 지역 등 주요 전략 거점은 국제 공동 관리하에 두는 방안을 제안했다.
처칠은 독일 군국주의의 온상으로 여겨졌던 프로이센(Prussia)을 약화시키고, 바이에른(Bavaria) 등 남부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등과 묶어 새로운 다뉴브 연방(Confederation of the Danube)을 구상하는 안을 제시했다. 반면, 스탈린은 독일 민족 전체의 호전성을 경계하며 더욱 철저하고 영구적인 분할을 주장했으며 , 심지어 만찬 석상에서 독일군 장교 5만에서 10만 명을 처형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분할 구상안이 논의되었지만, 테헤란 회담에서는 독일 분할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정상들은 독일 분할 문제를 연합국 외무장관들로 구성된 유럽자문위원회(European Advisory Commission, EAC)에서 더 심도 있게 연구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도록 위임하는 데 합의했다.
폴란드 국경조정
폴란드 문제는 테헤란 회담에서 가장 민감하고 논쟁적인 사안 중 하나였다. 특히 폴란드의 동부 국경선을 어디로 할 것인가를 두고 서방 연합국과 소련 간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스탈린은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 시 확보했던 폴란드 동부 영토에 대한 소련의 영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폴란드의 동부 국경선을 1920년 영국 외무장관 조지 커즌(George Curzon) 경이 제안했던 소위 ‘커즌 라인(Curzon Line)’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커즌 라인은 대체로 민족 분포를 기준으로 설정된 선이었으나, 이를 적용할 경우 폴란드는 상당한 동부 영토를 상실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폴란드 분할안
동부 영토 상실에 대한 보상으로, 처칠은 폴란드의 서부 국경을 독일 영토였던 오데르(Oder) 강과 나이세(Neisse) 강을 따라 서쪽으로 대폭 이동시키는 방안을 스탈린에게 제안했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이로써 폴란드는 동쪽의 농경지 및 습지대를 잃는 대신, 서쪽의 공업화된 독일 영토(실레지아 등)와 발트해 연안의 일부(단치히 자유시, 동프로이센 일부 등)를 얻게 되었다. 스탈린은 이러한 국경 조정이 소련의 서부 국경 안보를 강화하는 완충지대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했다.
이러한 폴란드 국경 조정 합의는 몇 가지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내포한다. 첫째, 이 결정은 당시 런던에 망명 중이던 폴란드 정부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강대국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스탈린은 런던 망명정부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으며 , 테헤란 회담 직전에 이미 소련은 이 정부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한 상태였다. 처칠은 영국이 폴란드 독립 보장을 위해 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도 , 결국 스탈린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루스벨트는 1944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 내 폴란드계 유권자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폴란드 국경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나 확약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셋째, 이 결정은 전후 처리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확정(포츠담 회담, 1945년)되었지만 , 수백만 명의 독일인 추방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으며 , 폴란드가 사실상 소련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철의 장막 배경
폴란드 국경 조정 합의는 전후 동유럽 질서에 대한 소련의 강력한 영향력을 서방이 사실상 인정한 첫 사례로, 냉전 시대 ‘철의 장막(Iron Curtain)’ 형성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는 군사적 현실주의(소련군의 동유럽 점령)와 연합국 협력 유지라는 명분 아래 약소국의 운명이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동부전선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군사적으로 동유럽을 장악하고 있던 소련은 안보 완충지대 확보를 명분으로 폴란드 동부 영토를 요구했고 , 서방, 특히 루스벨트는 오버로드 작전 성공과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라는 더 큰 전략적 목표를 위해 소련의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여 이를 용인한 것이다.
폴란드 망명정부의 입장이나 민족자결 원칙보다는 연합국의 대의와 군사적 현실이 우선시된 이 현실적 타협은 결과적으로 소련이 동유럽에 자국의 정치 시스템을 강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발트3국 문제
폴란드 문제와 더불어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지위 문제도 논의되었다. 이들 국가는 1940년 소련에 의해 강제 병합되었으나, 미국 등 서방 국가는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이들 국가가 소련에 재편입되기 전에 각 공화국 시민들의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는 원칙을 스탈린에게 제기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 문제가 “소련 헌법에 따라” 해결되어야 할 국내 문제임을 강조하며, 주민투표에 대한 어떠한 국제적 감시나 통제도 수용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이는 발트 3국 문제에 대한 소련의 주권을 재확인하고 서방의 개입을 차단하려는 의도를 명확히 드러낸 것으로, 사실상 루스벨트의 제안을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스탈린의 이러한 태도는 향후 소련의 영향권 내 문제에 대한 서방의 개입이 극히 제한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국제연합(UN) 창설 논의
테헤란 회담에서는 전후 국제 평화와 안보를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기구 창설 문제도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졌다. 이미 1943년 10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 영국, 소련, 중국 4개국 외무장관들은 전후 ‘일반 국제기구(general international organization)’ 창설의 필요성에 합의하고 이를 공동 선언문(모스크바 선언)에 명시한 바 있었다.
테헤란에서 루스벨트는 스탈린과의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 자신의 구체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그는 미래의 국제기구가 크게 세 개의 기구로 구성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첫째는 모든 회원국이 참여하는 대규모 협의체(총회와 유사), 둘째는 비군사적 문제를 다루는 소규모 집행위원회, 그리고 셋째는 국제 평화와 안보에 대한 위협을 다루고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미국, 영국, 소련, 중국 4대 강국 중심의 기구, 즉 ‘4인의 경찰관(Four Policemen)’ 개념이었다. 이 구상은 강대국들에게 국제 평화 유지에 대한 특별한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1945년 UN 창설
이에 대해 처칠은 전 세계적인 단일 기구보다는 유럽, 아시아, 미주 등 각 지역별 위원회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방안에 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스탈린은 루스벨트의 세계적인 기구 창설 구상 자체에는 동의했지만, 초기에는 중국을 미국, 영국, 소련과 동등한 ‘4인의 경찰관’ 중 하나로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이는 당시 중국의 국력과 국제적 위상에 대한 평가, 그리고 전후 아시아에서의 세력 균형에 대한 소련의 계산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1945년 UN 건
테헤란 회담에서 국제연합의 구체적인 구조, 회원국 자격, 의사결정 방식(특히 강대국의 거부권 문제) 등에 대한 최종적인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빅3’ 정상이 직접 만나 전후 국제기구 창설 원칙을 재확인하고 기본적인 구상을 교환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테헤란에서의 논의는 이후 1944년 덤바턴 오크스 회담(Dumbarton Oaks Conference)에서의 구체적인 헌장 초안 작성과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San Francisco Conference)를 통한 국제연합(UN)의 공식 출범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