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룸버그(Bloomberg)의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러시아가 막대한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자국의 핵심 안전자산인 금 보유고를 가파른 속도로 처분하고 있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과거 세계 최대의 금 매입국 중 하나였던 러시아가 ‘순매도국’으로 급격히 선회하면서 글로벌 금 시장의 수급 구조와 지정학적 자금 흐름에 큰 파장이 일고 있다.
러시아, 4달간 금 90만 온스 전격 매각…보유고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수준으로 급감
블룸버그가 인용한 러시아 중앙은행(Bank of Russia)의 최신 데이터에 따르면, 2026년 1월부터 4월까지 불과 4개월 동안 러시아의 금 보유고는 약 90만 온스(oz) 감소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의 전체 금 보유량은 7,390만 온스로 쪼그라들었으며, 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기 직전인 2022년 2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해당 기간 글로벌 금 시장의 평균 시세가 온스당 약 4,800달러라는 역사적인 고점 안팎을 기록했던 점을 감안하면, 러시아 중앙은행이 시장 가격으로 금을 청산해 확보한 현금 자산은 최소 43억 달러(약 5조 8,000억 원) 규모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2026년 러시아 금 매각 추이
자료:블름버그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만 해도 러시아 중앙은행은 자국 내에서 채굴되는 금 생산량의 거의 전량을 독점 매입하며 글로벌 금 시장의 가장 거대한 ‘고래(주요 구매처)’ 역할을 해왔으나, 2020년 초 매입 중단을 선언한 이후 이제는 자금 조달을 위해 금을 대거 내다 파는 매도 기조로 완전히 돌아섰다.
러시아가 금 보유고를 급하게 처분한 이유
러시아가 ‘전쟁 보루’로 여겨지던 금 잔고를 급격히 비워내고 있는 배경에는 서방의 전방위적 제재 장기화와 전황 악화에 따른 구조적인 재정 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에너지 매출 감소 및 국방비 폭증에 따른 재정 적자 보전: 에너지 무기화를 통한 러시아의 수출 전술이 서방의 가격 상한제와 공급망 다변화로 제동이 걸리면서, 러시아의 핵심 수입원인 석유·가스 유로화 매출이 크게 감소했다. 반면, 장기화되는 우크라이나 전선 유지와 차세대 미사일 생산 등을 위한 국방 예산은 천문학적으로 치솟아 국가 재정이 심각한 적자 수렁에 빠졌다.
국가복지펀드(NWF) 내 자산 유동화의 한계: 러시아 재무부는 가용 외환 자산이 고갈되자 국책 기금인 국가복지펀드(National Wellbeing Fund)에 비축해 두었던 금과 외환 자산을 전격 유동화하기 시작했다. 서방 금융 결제망(SWIFT)에서 차단된 상태에서 즉각적인 현금(Cash)을 융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금 매각이었기 때문이다. 즉, 경제 제재 속에서 통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금시장에 미친 영: 고점 정체 압박과 시장 주도권 재편
러시아의 공격적인 금 매각 행보는 사상 최고가 행진을 이어가던 글로벌 금 시장의 역학 관계를 뒤흔들고 있다.
10년 금값 추이
자료:goldprice.org
금값 추가 상승 제한 및 단기 오버행(잠재적 과잉 물량) 압박: 온스당 4,800달러 선을 상회하며 고공행진을 하던 국제 금 시세는 러시아 중앙은행발 대규모 공급 물량이 주기적으로 시장에 쏟아지면서 단기적인 상단 억제 압박을 받고 있다. 러시아가 현금화 속도를 더 높일 경우 시장의 심리적 지지선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중국·인도 중심의 장외시장(OTC) 거래 활성화와 시장 왜곡: 서방의 제재로 인해 러시아는 런던금시장연합회(LBMA) 등 주류 공식 시장에서 금을 정상적으로 유통할 수 없다. 따라서 블룸버그 등 외신들은 러시아가 중국, 인도, UAE 등의 중앙은행이나 민간 브로커를 통해 할인가로 금을 대량 넘기는 장외 거래(Over-the-Counter)를 전개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는 공식 금 시세와 실제 거래가 사이에 괴리를 발생시켜 지정학적 자금 세탁 구조를 심화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결과적으로 과거 금을 빨아들이며 달러 패권에 맞서던 러시아의 ‘금 요새’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한 현금 인출기로 전락했으며, 이러한 매도 폭주는 우크라이나 전장의 막대한 소모전이 러시아 경제의 가장 깊은 외환 보루까지 갉아먹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방증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