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시인에게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화가에게 ‘그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 사진 경력이 일천한 내가 한마디로 정의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숙제이다.
그렇다면 유명 사진가와 이론가들은 사진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그들의 생각을 통해 사진의 본질에 다가가 볼 수 있다.
최민식
일생을 사진만 찍다 돌아가신 우리나라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가 최민식 선생에게도 정의하기 어려운 명제였던 모양이다. 그는 2005년 『사진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 사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사진을 위한 사진’이 아닌 ‘삶을 위한 사진’이어야 한다
최민식
그의 책 중에 인상 깊었던 구절은 ‘사진을 위한 사진’이 아닌 ‘삶을 위한 사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진가의 렌즈는 인간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하고, 인생을 찍어야 하며, 힘 있는 사진, 가치 있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작가정신이 중요하며 사진은 시대의 얼굴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진은 사상이다’라고 정의한다.
막 사진에 입문하려는 초보자나 기성작가들 모두 카메라를 들기전에 '나의 사진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구해야 한다. 사진에 담긴 내용, 사진의 사상은 공상이나 말장난이 아닌, 진실을 이끌어 내기 위한 구체적이고 필수적인 장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진이라는 울림을 통해 파장을 내려면 무엇보다 작가의 사상이 중요하다 .
최민식
크리스틴 발터스 페인트너 (Christine Valters Paintner)
크리스틴 발터스 페인트너는 종교인이다. ‘예술 수도원(Abbey of the Arts)의 온라인 수녀원장이다.
그녀는 여기서 믿음으로 세상을 보고 아름다움을 영혼으로 느끼는 훈련과 창조적 표현에 관한 수업을 한다.
그녀가 쓴 『마음, 사진을 찍다』(부제: 마음의 눈을 뜨게 만드는 사진 찍기)는 마음 수련 도구로서의 사진 생활을 강조한다. 이 책은 ‘사진이란 단순히 세상을 찍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움직임을 담는 통로이다’라고 정의한다.
사진은 영혼을 담는 통로
크리스틴 발터스 페인트너
크리스틴은 사진을 어떻게 찍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는 기술적 측면보다는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더 강조하고 있다. 사진은 본다는 것의 의미를 찾아가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마음으로 세심하게 관찰하고, 새롭게 바라보고, 자신과 둘러싼 사회, 세상을 바라보는 의미를 찾는 도구로 여기고 있다.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그 찰나의 순간이 우리를 깨운다. 예술의 목적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각을 새롭게 함으로써 우리를 일상의 영역으로 되돌리는 데 있다. 밖으로 나가서 ‘아름다운’ 사진을 찍으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저 ‘다르게’ 보는 데 관심을 기울이면 된다.
'마음의 눈으로 보기’ 중에서
수전 손택 (Susan Sontag)
미국의 대표적인 지성이며 행동하는 작가로 알려진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현대인들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에 대한 심도 있는 견해를 표명한다. 초기 대표적인 에세이 『일체의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예술을 해석하는 행위를 ‘지식인들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라고 규정하면서 예술을 심미적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반해석론을 주장하였다.
예술가가 만들어 내는 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은 미학의 오랜 화두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빈센트 반 고흐의 낡은 구두를 거론하며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한다. 구두에서 제품의 본래의 기능이 사라지고 삶의 흔적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이다. 수전 손택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철학적 혹은 미학적 지식에 근거한 해석이 아니라 작품의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2003)은 이미지 과소비에 대한 비판을 담아낸 책이다. 전쟁, 사진과 저널리즘, 고통을 보려는 욕망과 연출된 사진들, 죽음, 사진이 전달하는 이미지, 이를 바라보는 인간의 본성, 그리고 대중매체의 무감각한 측면을 다루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폭력이나 잔혹함, 처참함, 고독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뒤덮여 있다. 기술의 발달은 이런 이미지를 어디서나 언제나 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손쉬운 공유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을 키워준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녀의 견해이다. 이미지 과잉 사회에서 손쉽게 접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미지는 간접 경험을 통한 공감 능력을 키워주기보다는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무분별하게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마을과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 작품화 하고 이를 통해 자기 만족을 얻는 사진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게 해준다.
사진은 메멘토 모리다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On Photography)』는 사진에 관한 에세이이다. 이 책은 사진의 본질 깊숙한 곳까지 안내한다. 행동하는 작가답게 사진을 사회와 함께 통찰한다. 그녀는 플라톤의 동굴에서 벗어나고, 거짓된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라고 조언한다.
수전 손택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진에 찍힌 대상을 전유(오로지 혼자서 소유)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진은 이 세상의 크기를 마음대로 주무른다. 자르기도 하고, 꾸미기도 하고, 삭제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사진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단언적으로 정의한다. 사진에 찍힌 순간의 피사체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진 찍는다는 것을 부드러운 살인이라는 용어로 승화시켜 표현한다.
사진은 애수가 깃들어 있는 예술, 황혼의 예술이다. 사진에 찍힌 피사체는 찍혔다는 바로 그 이유로 비애감을 띠게 된다. 추하거나 기괴한 피사체도 사진작가의 눈에 닿으면 그때부터 고귀해지기에 감동을 줄 수 있다. 아름다운 피사체라면 이미 오랜 세월을 보냈다거나 쇠약해졌다거나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애처러운 감정을 자아내는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사진은 메멘토 모리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다른사람 혹은 사물의 죽음, 연약함, 무상함에 동참하는 것이다. 찍힌 순간을 정확히 베어내 꽁꽁 얼려 놓는 식으로 속절없이 흘러간 시간을 증언해준다.
수전 손택
수전 손택의 책은 가벼이 읽고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진의 본질에 대하여 좀 더 통찰력 있게 접근하기 때문에 새겨 읽어 볼 만하다. 그녀는 또한 사진 생활을 함에 있어 사진 잘 받는 곳을 찾느라 사진가의 경험을 제한하고, 경험을 그곳의 이미지로 기념품화 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프랑스의 기호학자이자 철학자이며, 문화 연구자이고, 문학비평가인 롤랑 바르트는 사진에 관한 이론을 정립한 사람 중에 하나이다. 지금도 그가 남긴 책 『밝은방』(1980)은 사진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은 필독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사진론에 대한 논문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 중에 하나이다. 그는 기호학자로서 사진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어떤 구조로 이뤄지며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사진은 부존재의 존재이다"
롤랑 바르트
그가 펼치는 내용들은 철학과 인문학, 그리고 문학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읽으면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난해하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림을 그릴 때 하이데거의 미학 이론을 공부하고 그린 것이 아니듯, 사진가들이 모두 롤랑 바르트의 사진론을 공부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는 롤랑 바르트가 펼친 사진에 대한 단상 중에 몇 가지 부분들만 정리하여 공유하고자 한다.
사진에 대한 3가지 관점
바르트는 사진을 ‘촬영자’, ‘구경꾼’, ‘유령’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촬영자는 사진가를 의미하며 그가 어떤 눈으로 피사체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작품이 된다. 여러 사람이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 같은 피사체를 찍더라도 다른 사진이 나오는 것은 작가의 삶과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구경꾼은 사진을 바라보는 자이다. 그가 어떤 경험의 소유자이고, 어떤 사고의 소유자이냐에 따라 같은 사진도 다르게 해석되기 마련이다.
유령은 피사체 자체를 의미한다. 그는 사진에 찍힌 대상이 발산하는 환영적 이미지라고 한다. 이 유령을 잘 포착하여 사진가의 눈으로 카메라에 포착하는 것이 사진이다. 이를 보고 해석하는 것은 구경꾼의 몫인 것이다. 사진가와 구경꾼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면 사진에 대한 느낌도 다를 것이다.
여기에 ‘카메라의 눈’이라는 하나의 관점을 더 추가해 볼 수 있다. 카메라 기술과 광학 기술의 발달로 사람의 눈과 다른 관점을 사진에 불어넣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바르트 자신은 촬영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이데거처럼 구경꾼의 관점에서 사진론을 전개해 나간다.
사진은 흐르는 시간을 특별한 순간으로 전환시켜 준다
롤랑 바르트
노에마(Noema)의 실현
사진이 철학과 현상학으로 넘어가는 개념 같다. 우리 내면의 의식은 기능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측면이 함께 존재하는데 기능적인 측면을 노에시스(Noesis)라고 하고, 의식의 객관적인 측면을 노에마(Noema)라고 한다. 사진을 전공하거나 교육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이렇게 복잡한 개념까지는 필요 없다고 하지만 사진 이론적 관점에서 소개하니 가볍게 읽고 넘어가기 바란다.
사진에 찍히는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 셔터가 찰칵하고 울리는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다. 셔터가 닫히는 순간은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여 과거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카메라의 필름이나 CCD에 기록된 이미지는 다시 태어나 영원한 삶을 얻는다. 즉 사진은 ‘부존재의 존재’인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추억 속에 남아 있는 피사체이지만 사진은 그것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이를 ‘사진의 노에마(Noema)’가 실현되는 순간이라고 한다.
이는 사진이 일상적인 크로노스(Chronos) 시간에서 벗어나 카이로스(Kairos) 시간에 머물게 해주는 역할임을 의미한다. 순간은 울림이 있다. 사진은 흐르는 시간(크로노스)에서 특별한 순간(카이로스)로 전환시켜 준다.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
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밝은방(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의 본질을 치밀하게 탐구한다. 그가 내세운 두 개의 개념,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은 이후 사진 이론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데 큰 역할을 한다.
SNS에 시시각각으로 풍경 사진, 음식 사진, 꽃 사진, 인물 사진, 셀카 사진 등 다양한 사진들이 올라온다. 이런 잘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아름답구나, 멋지다, 예쁘다, 맛있겠다-라고 느끼게 된다. 일반적으로 느끼는 감상일 것이다. 반면 강력한 느낌으로 다가와 나의 폐부를 푹 찌르는 사진을 종종 보게 된다.
전자와 같이 보편적인 사진 감상을 스투디움이라 했고, 후자와 같이 이미지에서 개인적 취향이나 경험, 잠재의식 등과 연결돼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강렬한 자극을 푼크툼이라고 했다. 사진을 감상하는 사람이 본인의 삶에 대한 경험을 동원하면서 스스로 사진 의미를 부여해 나가는 개념이 푼크툼이다(이렇게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시니피앙스라고 한다). 사진의 본질 중의 하나는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스니피앙스를 느끼게 해주는 데 있다. 감상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푼크툼을 드러내는 것은 본인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다 보여 주는 것이다.
명확히 개념 짓기 어려운 푼크툼이라는 개념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하고, 롤랑 바르트 스스로도 부족한 점을 시인하긴 하였지만, 사진을 이해하는 밑바탕이 된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이미지(글, 그림, 사진 등)는 스투디움에 푼크툼이 조화롭게 표현되었을 때 더욱더 빛이 난다고 생각한다.
예술로서의 사진
사진작가 최민식, 수전 손택, 그리고 롤랑 바르트는 사진 작품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반면 크리스틴 발터스 페인트너는 사진 하는 과정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 세 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시대적 소명과 작가정신을 가지고 보는 이의 가슴을 푹 찌를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담으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진정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역량이 부족한지라 ‘사진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정리하면서 강한 느낌을 받았던 사진 2점을 대신 소개한다.
이상일 작가의 ‘으므니’
이상일 작가의 ‘으므니’ 중에 한 작품이다. 그는 늙은 어머니가 죽어가는 모습을 병석에서부터 시작해 땅에 묻히고 땅에 풀이 돋기까지를 담았다. 마치 롤랑 바르트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을 정리하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 ‘온실 사진’을 보고 강한 푼크툼을 느꼈듯이 이 사진을 처음 본 순간 무엇인가 가슴으로 푹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가 말한 ‘부존재의 존재’인 것이다.
사진 한 장이 많은 상상을 하게 만든다. 3개의 눈이 스친다.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 그리고 프레임 밖에 이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있는 작가의 눈, 마지막으로 이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눈이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나를 제외한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을 보고 느낀 것을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스스로 유추해본다.
- 고명진 作
<아! 나의 조국>은 1987년 6월 26일 한국일보의 고명진 사진기자가 촬영한 보도사진이다. 사진에는 부산 문현동 로터리에서 열린 6월 항쟁 시위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 남성이 웃통을 벗고 두 팔을 벌리며 달려가는 자세가 담겨 있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 뭉클한 시대정신이 느껴진다. 이 소용돌이를 함께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들의 열망과 노력으로 찾은 오늘의 민주주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