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국장의 모스크바 방문, 4시간이 남긴 질문…

존 랫클리프 CIA 국장

존 랫클리프 CIA 국장의 전격적인 모스크바 방문은 단순한 미·러 정보기관 간 접촉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은 러시아에 발트 3국에서의 군사적 긴장 고조를 경고하는 동시에, 이란에 대한 군사·경제 지원을 줄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보도됐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미국 공군 C-17 수송기를 타고 라트비아를 거쳐 모스크바로 향했다.

8월 25일 존 랫클리프(John Ratcliffe) CIA 국장은 사전 발표 없이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비행 추적 자료에 따르면 그가 탑승한 것으로 알려진 미 공군 C-17 Globemaster III는 워싱턴 인근 앤드루스 합동기지를 출발해 라트비아 리가를 거쳐 모스크바 브누코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랫클리프가 모스크바에 머문 시간은 약 4시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그 라트비아가 랫클리프가 모스크바에서 논의한 핵심 국가 가운데 하나로 지목됐다는 것이다.

Politico는 사안을 잘 아는 복수의 관계자를 인용해 랫클리프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러시아에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을 상대로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고 보도했다. Wall Street Journal 역시 이번 방문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러시아에 NATO 회원국을 공격하지 말라는 직접적인 경고를 전달하는 것이었다고 전했다.

미국이 걱정하는 것은 전면전보다 ‘작은 도발’일 수 있다

이번 방문을 이해하려면 최근 미국 정보당국이 러시아의 행동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Wall Street Journal은 이달 초 미국 정보당국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NATO의 결속력을 시험하기 위해 동맹국을 상대로 제한적인 행동에 나설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는 대규모 NATO-러시아 전쟁이라기보다 사이버 공격, 사보타주, 드론 침범 또는 제한적인 군사적 월경처럼 NATO가 집단방위조약 제5조를 발동해야 하는지를 놓고 내부 논쟁을 벌일 만한 회색지대 행동이다.

그 가운데 가장 취약한 지역이 발트 3국이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모두 NATO 회원국이지만 러시아 및 벨라루스와 인접해 있고, 러시아의 군사 거점인 칼리닌그라드도 가까이에 있다. 러시아가 이 지역에서 제한적인 군사 행동 또는 하이브리드 공격을 감행할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영토 자체의 규모가 아니다.

핵심은 NATO가 실제로 움직이는가이다.

NATO 조약 5조의 신뢰성은 “회원국 하나에 대한 공격은 전체에 대한 공격”이라는 전제에 달려 있다. 따라서 러시아 입장에서 작은 규모의 도발만으로도 미국과 유럽이 실제 군사적 대응에 나설 의지가 있는지를 시험할 수 있다.

랫클리프의 메시지가 실제로 발트 3국에 집중됐다면 미국은 러시아에 사실상 다음과 같은 신호를 전달한 셈이다.

“우리는 당신들이 무엇을 검토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발트해에서 NATO의 의지를 시험하지 말라.”

두 번째 메시지는 이란이었다

하지만 랫클리프가 모스크바에 가져간 메시지는 유럽 문제만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Politico는 랫클리프가 러시아 측에 이란에 대한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줄일 것도 요구했다고 전했다. 보도를 통해 알려진 영국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은 특히 러시아가 테헤란에 무기와 방위기술을 이전하는 것을 중단하도록 압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요구가 중요한 이유는 현재 러시아와 이란의 관계가 단순한 외교적 연대를 넘어 정보·군사 협력 문제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3월 Washington Post는 미국 관리들을 인용해 러시아가 이란에 미국 군사자산의 위치 등 표적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기에는 중동 지역의 미 군함과 항공기 위치 정보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가 보유한 위성 정보가 이란의 제한적인 자체 우주정찰 능력을 보완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Wall Street Journal도 러시아가 이란에 중동 내 미군 위치와 관련된 정보를 비밀리에 제공하고 있다는 미국 관리들의 평가를 보도했다. 다만 공개된 정보만으로 러시아가 실제 개별 공격의 표적 선정 과정에 어느 수준까지 관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7월에는 이 문제가 한 단계 더 심각해졌다.

Reuters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 등 걸프 지역의 CIA 관련 시설을 겨냥한 이란의 정밀 드론 공격을 두고 미국 정보당국이 러시아의 기술 또는 표적 정보 지원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부 정보평가에서는 러시아 기술로 개선된 Shahed 계열 드론이 사용됐을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그러나 러시아의 직접 관여 여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최종적인 공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즉 워싱턴 입장에서 러시아-이란 협력은 더 이상 우크라이나 전쟁 밖의 부차적 문제가 아니다.

러시아의 정보와 기술이 이란의 공격능력을 높이고, 그것이 다시 중동의 미군과 미국 정보시설을 위협하는 구조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것은 푸틴이 아니었다

러시아 정부는 랫클리프의 방문 자체는 공식 확인했다.

크렘린 대변인 드미트리 페스코프는 랫클리프가 러시아 정보기관 관계자들과 접촉했다고 밝혔다. 다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직접 회담은 없었다고 말했다. 대신 푸틴은 회담 내용을 즉시 보고받았다고 설명했다.

이는 이번 방문의 성격을 보여준다.

공식적인 정상외교나 외무장관 회담이 아니라 정보기관 수장이 상대국 정보기관을 통해 최고 지도부에 직접 전략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채널이 가동된 것이다.

국가 간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을 때도 정보기관 간 채널은 완전히 끊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군사적 오판이나 예상하지 못한 충돌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이번 방문은 협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위기관리용 백채널(back channel)​에 가까울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는 왜 ‘semi-routine’이라고 했나

다만 백악관의 공개 설명은 언론 보도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보수 성향 방송인 글렌 벡과의 인터뷰에서 랫클리프의 방문을 “sort of semi-routine”, 즉 어느 정도 통상적인 방문이었다고 표현했다.

발트 3국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 가능성이나 이란 제재 문제가 방문 목적이었느냐는 질문에도 트럼프는 “None of the above”라고 답했다.

대신 그는 “무언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며 미국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현재 공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과 보도 내용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확인된 사실은 랫클리프 CIA 국장이 8월 25일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러시아 정보기관 관계자들과 회담했으며 푸틴은 그 결과를 보고받았다는 것이다.

반면 발트 3국에 대한 경고와 이란 지원 축소 요구는 Politico와 Wall Street Journal이 익명의 미국·영국 관계자 등을 인용해 보도한 내용이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공개적으로 부인하거나 축소했다.

이러한 정보의 차이 자체도 이번 방문의 성격을 보여줄 수 있다. 민감한 전략적 경고는 공개 외교보다 정보기관 채널을 통해 전달하면서,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긴장을 낮추는 메시지를 내는 방식이다.

2021년 빌 번스의 모스크바 방문이 떠오르는 이유

이번 방문이 더욱 주목받는 데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현직 CIA 국장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진 것은 2021년 11월 윌리엄 번스 당시 CIA 국장 이후 처음이다.

당시 번스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미국 정보당국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주변에 병력을 집결시키는 것을 포착하고 있었고, 번스는 러시아 지도부에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할 경우 심각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경고를 전달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약 3개월 뒤인 2022년 2월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 침공을 시작했다.

따라서 2026년 랫클리프의 방문은 불편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2021년에는 미국 정보기관이 러시아의 군사 행동 가능성을 포착했고 CIA 국장이 모스크바로 날아가 경고했다.

2026년에는 다시 미국 정보기관이 러시아가 NATO의 결속을 시험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가운데 CIA 국장이 모스크바를 찾았다.

두 방문 모두 핵심은 동일하다.

상대방이 아직 행동하기 전에 미국이 “우리는 알고 있다”고 직접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2021년의 사례가 보여주듯 정보 공개와 경고가 반드시 억지(deterrence)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방문의 핵심은 ‘두 전선의 연결’이다

랫클리프의 4시간짜리 모스크바 방문을 단순히 NATO 문제나 우크라이나 전쟁의 연장선으로만 보면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 있다.

미국이 러시아에 전달했다는 두 가지 요구는 서로 다른 지역에 관한 것이지만 실제 전략적으로는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는 유럽 전선이다.

러시아가 발트 지역에서 NATO의 결속력을 시험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억제해야 한다.

두 번째는 중동 전선이다.

러시아가 이란에 정보·무기·기술을 제공해 미국의 군사적 부담을 더 키우지 못하도록 차단해야 한다.

미국으로서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 전쟁으로 이미 막대한 군사자원과 방공 미사일을 투입한 상황에서 유럽에서 또 하나의 군사위기가 열리는 것이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다. 최근 서방에서는 Patriot 계열을 비롯한 핵심 방공 탄약의 재고와 생산능력을 둘러싼 우려도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랫클리프가 들고 간 두 개의 메시지는 결국 하나의 문제로 수렴한다.

“러시아가 유럽에서 새로운 위기를 만들지 말고, 중동에서도 미국의 상대방을 강화하지 말라.”

이는 미국이 동시에 여러 지역에서 벌어지는 충돌을 개별 전쟁이 아니라 하나의 연결된 전략적 부담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신호일 수 있다.

4시간의 방문이 남긴 질문

랫클리프의 C-17은 라트비아 리가에서 출발해 모스크바에 들어갔다가 약 4시간 만에 다시 떠났다.

긴 협상을 위한 일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사전에 정해진 메시지를 전달하고 상대방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한 방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이유다.

그리고 그 메시지가 언론 보도대로라면 상당히 명확하다.

발트 3국에서 NATO를 시험하지 말 것.

이란의 군사능력을 강화하는 지원을 중단할 것.

2021년 빌 번스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막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던 것처럼, 2026년 존 랫클리프 역시 아직 일어나지 않은 더 큰 충돌을 막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하나의 전쟁만을 놓고 경고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발트해에서 걸프만까지, 러시아의 행동이 미국의 두 개 전략 전선에 동시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 ‘모스크바 4시간’​의 의미는 방문 시간보다 훨씬 클 수 있다.

경영혁신 전문가 & 지정학 전략 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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