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회담 당시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국민당 정부는 내륙의 충칭으로 수도를 옮겨 일본과 항전하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수도 이전
카이로 회담에 주요 참가국으로 참여한 중화민국은 당시 극심한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고 있었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만주사변을 기점으로 하면 1931년부터)은 장기화되면서 중국 전역을 황폐화시켰고, 막대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파탄을 초래했다. 일본군은 중국 동부의 주요 도시와 산업 지대를 점령했으며 ,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내륙의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겨 항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는 여러 가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장비와 훈련이 우수한 일본군에 비해 열세였으며 , 경제적으로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며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정부 내부의 부패 문제와 비효율성도 심각했으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 군벌 세력도 여전히 존재했다.
장제스(장개석)와 마오쩌퉁(모택동)의 마지막 만남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관계는 제2차 국공합작이라는 표면적인 협력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불안정했다. 1937년 항일(抗日)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형식적인 합작이 이루어졌지만 , 양측 간의 뿌리 깊은 불신과 이념적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군과의 전면전보다는 서로를 견제하며 미래의 권력 투쟁을 대비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경향을 보였고, 이는 종종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기도 했다. 미국은 중국의 내분이 항일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킨다고 판단하여 양측의 협력을 촉구하거나 중재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처럼 많은 내부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연합군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 대륙에 수십만 명의 일본군을 묶어둠으로써 다른 전선에서의 연합군 작전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러한 중국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며, 물류상의 어려움과 다른 전선의 우선순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고 정치적 지지를 보냈다. 미국에게 중국은 단순히 전쟁 동맹국일 뿐만 아니라, 전후 아시아에서 일본을 대체하여 지역 안정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파트너로 간주되었다.

국민당 정부군과 일본군의 전선
결국 1943년 중국의 상황은 모순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침략에 맞서 싸우는 피해자이자 연합군의 중요한 전략적 자산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부 분열과 정치적, 경제적 취약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은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의 입지와 협상력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장제스는 국제 사회의 인정과 실질적인 지원을 갈망했지만, 미국과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입장에서 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강대국’ 지위는 상당 부분 미국의 지지에 의존하는 측면이 있었으며 , 이는 중국이 회담에서 상징적인 인정과 함께 영토 회복, 원조 확보 등 구체적인 이익을 얻는 데 집중하게 만들었다.

충칭-현황을 브리핑 받는 장제스(장개석)
또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첨예한 대립은 중국의 대외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장제스가 공산당 세력을 궁극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소련의 스탈린을 불신했던 것은 , 그가 미국과의 관계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전후 회복될 영토에 대한 국민당의 통제력 강화라는 국내 정치적 목표가 그의 외교적 행보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던 상황은 역설적으로 미국이 중국의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