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due course”라는 모호한 표현과 그 이면에 숨겨진 신탁통치 구상은 해방 직후 한국 사회를 극심한 찬반 논쟁으로 몰아넣었다. 이는 민족 내부의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키고 통일 정부 수립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미소 양군의 분할 점령과 냉전 대립 속에서 한반도 분단이 고착화되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이어졌다.
카이로 회담은 단순한 군사 전략 회의를 넘어, 각국의 전후 구상과 국가적 야심이 충돌하고 타협하는 복잡한 외교의 장이었다. 미국은 중국의 지속적인 항전을 유도하고 전후 아시아 질서를 주도하기 위해 중국의 위상을 높이고 영토 요구를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은 미국의 지원과 국제적 인정을 통해 실리를 확보하고자 했다. 영국은 자국의 제국적 이익을 지키면서 유럽 전선에 집중하려 했다.
일본군은 중국 동부의 주요 도시와 산업 지대를 점령했으며 ,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내륙의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겨 항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는 여러 가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장비와 훈련이 우수한 일본군에 비해 열세였으며 , 경제적으로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며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관계는 제2차 국공합작이라는 표면적인 협력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불안정했다.
선언문 초안 작성에는 해리 홉킨스(미국) 등 각국 고위 참모들이 참여했으며 , 특히 한국 관련 조항은 문구 수정을 거듭하는 협상 과정을 거쳤다. 선언문 발표가 회담 종료 후 며칠 뒤인 12월 1일에 이루어진 것은 회담에 불참했던 스탈린의 동의를 테헤란 회담에서 얻을 필요가 있었고, 보안상의 이유도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미친 영향은 극명한 양면성을 지닌다. 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 약속은 오랜 식민 통치하의 한민족에게 크나큰 희망을 안겨주었고, 독립의 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in due course”라는 모호한 단서는 즉각적인 주권 회복을 가로막고 신탁통치 논쟁을 촉발하여 해방 공간의 극심한 혼란과 분열을 야기했으며, 궁극적으로는 분단이라는 비극적 결과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