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회담 #05 저울 위에 놓인 한반도의 운명: 독립의 약속과 위기

카이로 회담이 남긴 복합적인 유산, 특히 한반도 문제에 드리운 긴 그림자는 오늘날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카이로 회담에서 처칠수강과 대화를 나누는 송미령(장제스 부인)

카이로 선언에서 가장 주목받는 부분 중 하나는 바로 한국의 독립에 관한 조항이다. 이는 수십 년간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 하에 있던 한민족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주었지만, 동시에 그 표현의 모호함으로 인해 해방 이후 격렬한 정치적 논쟁과 혼란의 씨앗이 되었다.

한국 조항의 탄생: 기원과 포함 과정

선언문 내용

“앞의 3대국은 조선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에 조선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장제스의 역할

수의 기록과 연구는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다고 지적한다. 그의 동기는 일제 강점에 대한 도덕적 반감, 전후 한반도를 완충 지대로 삼으려는 전략적 고려,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는 의도, 그리고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KPG)의 지속적인 외교적 노력과 요청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영국의 역할 (처칠)

영국은 처음에 한국 독립 조항을 명시하는 것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는 영국 제국의 다른 식민지에 미칠 파급 효과를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주장에 따라 결국 동의하면서도, 독립 시기를 명확히 하지 않는 모호한 표현(“in due course”)을 선호하거나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주체적 노력

무엇보다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전개된 한민족의 독립운동 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김구, 조소앙 등) 및 이승만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외교적 노력이 한국 문제를 국제 사회의 의제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배경과 압력으로 작용했다.

한국에 대한 결과 평가: 긍정적 요인과 부정적 요인

한국 독립 조항의 포함 과정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장제스 주도설 vs. 루스벨트/미국 주도설)은 각국의 역사 서술이나 정치적 입장에 따라 특정 인물이나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려는 경향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장제스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중국의 우호적인 기여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일 수 있으며, 이승만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특정 정치 세력의 정통성을 내세우려는 시도일 수 있다. 

학문적 분석은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이 이미 존재했음을 지적하며 , 실제로는 장제스의 문제 제기, 미국의 기존 구상과의 부합, 임시정부 및 이승만 등의 로비 활동, 그리고 영국의 문구 수정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긍정적 의의

최초의 국제적 독립 보장: 수십 년간의 일제 강점 이후, 세계 주요 강대국들이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약속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독립운동의 정당성 확보: 오랜 기간 지속된 한국 독립운동의 목표에 대한 국제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전후 처리의 근거: 이후 포츠담 선언에서 재확인되었으며 , 해방 이후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논의하는 데 있어 중요한 근거 문서가 되었다.

부정적 결과

즉각적 주권 회복 부인: “in due course”라는 조건은 해방과 동시에 완전한 주권을 회복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신탁통치의 빌미 제공: 논란 많았던 신탁통치 계획을 정당화하는 국제적 근거를 제공했으며, 이는 해방 후 한국 사회의 극심한 정치적 분열과 갈등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강대국의 시혜적 태도 반영: 한국인의 자치 능력에 대한 불신과 후견주의적 시각(“노예 상태에 유의하여”라는 표현)을 반영하며, 한국의 운명을 외부 강대국들이 결정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분단의 간접적 요인: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독립 지연과 신탁통치라는 외부적 개입은 권력 공백 상태를 만들고 미소 양군의 분할 점령과 대립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반도 분단 고착화의 배경이 되었다.

“in due course”라는 표현 역시 우연이 아닌, 상반된 입장을 조율하기 위한 의도적인 외교적 수사였다. 독립 원칙(중국/미국 수사)과 신탁통치를 통한 점진적 이행(미국 계획), 그리고 즉각적 해방에 대한 영국의 유보적 태도를 모두 담아낼 수 있는 모호한 표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이로에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사용된 이 외교적 모호성은 해방 후 한국에서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극심한 갈등을 유발하며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전시 외교에서의 단기적 합의 도출이 장기적으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38선

카이로 회담의 복합적 유산

카이로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의 중대한 분수령에서 연합국의 대일 공동 전략을 조율하고, 일본의 패배와 영토 축소 원칙을 확립했으며,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격상시키고,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약속하는 등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연합국의 승리를 향한 의지를 다지고 전후 아시아 질서의 밑그림을 그리는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회담의 이면에는 복잡한 현실과 모순이 자리하고 있었다. 미국의 전후 구상, 영국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 중국의 국가적 염원 등 각기 다른 국가 이익이 충돌했으며, ‘영토 불확장’이나 ‘독립’과 같은 이상적인 수사 뒤에는 신탁통치 구상과 같은 현실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었다.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 등 지도자들의 개인적인 관계와 판단, 그리고 스탈린의 불참이라는 변수는 회담의 과정과 결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반도에 미친 영향은 극명한 양면성을 지닌다. 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 약속은 오랜 식민 통치하의 한민족에게 크나큰 희망을 안겨주었고, 독립의 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in due course”라는 모호한 단서는 즉각적인 주권 회복을 가로막고 신탁통치 논쟁을 촉발하여 해방 공간의 극심한 혼란과 분열을 야기했으며, 궁극적으로는 분단이라는 비극적 결과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결론적으로 카이로 회담은 전후 아시아 질서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이다. 이 회담은 강대국 외교가 지닌 가능성과 동시에 내재된 위험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전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전략적 판단과 외교적 타협이 의도치 않은 장기적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특히 약소국의 운명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카이로 회담이 남긴 복합적인 유산, 특히 한반도 문제에 드리운 긴 그림자는 오늘날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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