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택(遼澤)
요택(遼澤)은 글자 그대로 요하(遼河)의 늪을 의미한다. 하지만 과거 이 땅을 침공했던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군대(軍隊)에게 이곳은 단순한 습지(濕地)가 아니라 반드시 넘어야 할 커다 천연 방어선(天然 防禦線)이었다.
오늘날 랴오닝성 판진(盤錦)시 일대의 위성 지도(衛星 地圖)를 살펴보면, 가을마다 붉은 칠면초(七面草, Suaeda japonica)가 끝없이 펼쳐지는 장관(壯觀)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적인 생태 관광지인 홍해탄(紅海灘, Red Beach)이 위치한 이곳은 나무 데크 위를 오가는 관광객들로 붐비는 평화로운 장소다. 그러나 1,400년 전, 전쟁(戰爭) 당시의 풍경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
현대의 지리정보시스템(GIS)을 이용하여 고대의 지형을 분석해 보면 놀라운 결과가 나온다. 현재는 육지이지만 당시에는 바다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면적, 즉 지금보다 내륙 깊숙이 최대 40km이상 파고들어 와 있던 바다의 넓이만 약 2,978㎢에 달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수치만으로는 감이 잘 오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우리가 사는 서울시의 면적(약 605㎢)과 비교해 보자. 무려 서울 면적의 약 5배에 달하는 바다가 오늘날의 해안선보다 훨씬 안쪽까지 들어와 출렁이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역사서에 기록된 ‘200리 요택‘은 바로 이 고대 해안선 안쪽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200리(里)는 오늘날의 거리로 환산하면 약 80km에서 100km에 달한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가는 거리가 온통 진흙탕이라고 상상해 보라.
이 기록을 기준으로 당시 해안선 외곽으로 좌측으로는 대능하에서 우측으로는 혼하 안쪽까지 약 80km~100km는 요택이었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100만 대군을 이끌고 온 수 양제가 마주해야 했던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눈앞에는 내륙 깊숙이 들어온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그 뒤로는 발이 푹푹 빠지는 갈대 숲과 펄밭이 100km 가까이 이어져 진흙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택의 축소판, 순천만
굳이 중국의 요하까지 가지 않더라도, 대한민국 전남 순천만(順天灣)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순천만은 지형과 식생 면에서 ‘요택의 축소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흡사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첫째, 붉은 칠면초의 바다다. 용산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보는 순천만의 S자 물길 주변 갯벌은 가을이면 칠면초로 인해 붉게 물든다. 이는 앞서 언급한 중국 판진시 홍해탄의 풍경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어, 요하 하구의 생태 환경을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한다.
둘째, 갈대 숲의 미로다. 순천만 무진교를 건너 용산전망대로 향하는 길은 거대한 갈대(蘆, Reed) 군락 사이를 통과한다.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넘는 빽빽한 갈대 숲에 들어서면 주변 시야가 차단되고 오직 하늘만 보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들리는 갈대의 서걱거리는 소리는, 과거 당나라 군대가 느꼈을 매복에 대한 공포와 청각적 고립감을 짐작하게 한다.
셋째, 점토질 갯벌의 덫이다. 순천만의 갯벌은 모래가 거의 없는 미세한 점토질(粘土質)로 이루어져 있다. 발을 디디면 깊이 빠져들고, 강한 점성(粘性) 때문에 쉽게 빼낼 수조차 없다. 이것이 바로 요택의 바닥이자 실체였다.
진흙의 장벽
지금은 아름다운 생태 관광지이지만, 1,400년 전 수나라와 당나라 대군(大軍)에게 이 환경은 지옥과도 같았다. 당시에는 시야가 트인 낮은 칠면초 대신, 앞서 본 순천만의 갈대처럼 키 큰 갈대밭이 약 200리에 걸쳐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발을 디디면 무릎까지 빠지는 점토질 갯벌 위로 빽빽한 갈대 숲이 시야를 차단(遮斷)했다. 맑은 날에도 무거운 보급(補給) 수레의 바퀴는 순천만의 진흙처럼 바닥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고, 비가 내리면 지대 전체가 거대한 호수(湖水)로 변해 보병(步兵)조차 걷기 힘들었다. 바람에 갈대가 흔들리는 소리만 들릴 뿐, 늪지대 어디에 적군이 매복(埋伏)해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공포의 현장이었다. 지금의 아름다운 홍해탄 아래에는 과거 진흙탕 속에서 고전(苦戰)했던 수많은 병사와 부서진 수레바퀴의 흔적(痕跡)이 묻혀 있는 셈이다.
역사 속의 요택
이러한 요택의 악명은 중국과 한국의 역사서 곳곳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먼저 그 험난함을 세상에 알린 것은 113만 대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났던 수(隋)나라 양제(煬帝) 때의 일이다. 당나라 때 편찬된 정사(正史) 《수서(隋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帝以遼澤泥淖,車馬不通,命毗除道,接為橋梁,長二百里。” (황제는 요택이 진흙이라 수레와 말이 통할 수 없다고 여겨, 염비에게 명하여 길을 닦고 이어서 다리를 놓게 하니 그 길이가 200리에 달했다.)
황제의 명을 받은 토목 기술자 염비(閻毗)가 늪 위에 놓은 다리의 길이만 무려 200리였다고 하니, 당시 요택이 얼마나 광활하고 통과하기 힘든 난관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로부터 약 30년 뒤, 당(唐) 태종 이세민(李世民) 역시 똑같은 악몽을 마주했다.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 저술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수나라 때보다 더욱 처절했던 사투가 묘사되어 있다.
“遼澤泥潦,車馬不可通,命長孫無忌 … 載土及斬芻以填之。” (요택이 진흙과 고인 물로 인해 수레와 말이 지나갈 수 없었다.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흙을 싣고 풀을 베어 와서 그곳을 메우도록 했다.)
기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황제의 다급했던 모습을 덧붙인다. “帝亦於馬鞍負篲以助之(황제 또한 말안장에 섶을 싣고 날라 이를 도왔다)”라는 대목은, 천하를 호령하던 당 태종조차 직접 짐을 날라야 했을 만큼 요택이 극복하기 어려운 자연의 방벽이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정사(正史)인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를 통해서도 교차 검증된다.
“遼澤泥淖 … 人馬不可通 … 太宗親於馬上持薪填之。” (요택은 진흙이라 사람과 말이 통할 수 없었다. 태종이 친히 말 위에서 땔나무를 가지고 와서 그곳을 메웠다.)
이처럼 중국과 한국의 사료가 공통으로 증언하듯, 요택은 단순한 습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든든한 1차 방어선이자, 제국을 건설한 침략군에게는 넘어서는 것만으로도 진을 빼놓는 거대한 죽음의 늪이었다.
요택의 하구를 덮었던 붉은 칠면초(홍해탄, Read Beach) 요택(遼澤) 113만 수나라 대군과 당 태종의 발목을 잡았던 고대 요하의 늪, 요택. 서울 면적의 5배에 …